매일신문 [매일 파워 인터뷰] 류병선 영도벨벳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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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7.08.02
류병선 영도벨벳 회장이 대구 중구 삼덕동 영도다움에서 벨벳으로 만든 각종 제품들을 선보이며 벨벳의 고급스러움과 다양한 용도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박노익 대기자 noik@msnet.co.kr
"57년 벨벳 외길인생, 지금도 일을 할때 진정 살아있음 느껴"

[석민 선임기자 sukmin@msnet.co.kr] “머리에는 지혜를, 얼굴에는 미소를, 가슴에는 사랑을, 손에는 일이 함께하게 하소서…. 이것이 생활철학이자 사훈이고 매일 하는 기도입니다. 사람은 일을 할 때 비로소 진정으로 살아있음을 느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류병선(78) ㈜영도벨벳 회장은 ‘이제는 그만 쉬라’는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일이 나를 행복하게 해주는데, 그럼 내 스스로를 불행하게 하라는 말이냐고 되묻는다”고 말한다. 그리고 “인생에서 운이 중요하지만, 운이라는 것도 열심히 일하고 노력해야 오지 가만히 있으면 오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류 회장은 이런 철학과 삶의 자세로 고인이 된 남편 이원화 회장과 함께 영도벨벳을 한국이 자랑하는 세계일류기업으로 키워냈다. 창업 41년 만인 2001년 벨벳 부문에서 생산 및 수출 세계 1위에 오른 영도벨벳은 이탈리아 ‘조르조아르마니’, 미국 ‘앤클라인’ ‘탈보트’, 스페인 ‘자라’, 일본 ‘이토츄패션’ 등 세계 최고급 패션브랜드에서 사용하는 대표적 소재가 되었다. 세계 패션의 중심지 파리`밀라노`뉴욕 등에서 활동하는 유명 디자이너들도 영도의 쓰리 이글 벨벳을 선택하고 있다.
류 회장은 각종 사회활동에도 적극적이었다. 하지만 요즘은 하나둘씩 정리하고 있다. 불교총연합회신도회장, 대구시체육회부회장, 매년 108명에게 장학금을 주고 있는 보광명장학재단 이사장이 현재 맡고 있는 주요 직책이다.
"이제는 인재를 키우는 데 주력하고 싶습니다. 많은 돈보다 소액기부 참여자를 늘리고, 소액기부자들이 장학생들과 만나는 자리를 자주 마련할 계획입니다."

◆“미치지 않으면 되는 것이 없다!”
1940년 달성군 가창면 우록리에서 태어난 류 회장은 6살 때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일찍이 대구로 나와 생활했고, 초등학교 때 6`25전쟁을 겪었다. 그 당시 대부분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공부를 많이 할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다. 가내공업으로 과자공장을 하는 큰집에서 일을 하며 가족의 생계를 도왔다.
오빠 친구였던 고 이원화 회장과는 7년간의 연예 끝에 결혼했다. 남편 이 회장은 이모부와 동업으로 메리야스 공장을 운영하고 있었다. 결혼 후에는 국제고무공장에 털실을 납품했다.
“털실 납품이라는 것이 겨울 한 철만 일이 있었습니다. 6개월 일하고 나머지 6개월은 그냥 놀아야 했습니다. 자기 가족의 생계조차 책임질 수 없는 기업을 어떻게 기업이라고 부를 수 있겠습니까. 저와 남편은 1년 내내 생산할 수 있는 뭔가를 찾아야 했습니다.”
그 당시 혼수 필수품으로 최고 인기는 비로도(벨벳)였다. 국산품은 아예 없었고, 독일제와 일본제가 밀수되어 유통되고 있었는데, 가격이 비쌌다. 신혼집에 도둑이 들면 다른 것은 다 놔두고 비로도 제품만 훔쳐갈 정도였다. 그래서 20대 후반, 30대 초반의 류 회장 부부는 벨벳을 직접 만들기로 결심했다. 벨벳을 짜본 사람도, 염색해 본 사람도, 기계를 만들어 본 사람도 없었다.
국산화하기 위해서는 먼저 벨벳의 원단이 어떻게 짜여 있는지(조직(組織))를 알아야 했다. 독일제 원단을 가져다가 연구소에 분석을 의뢰했지만, 제대로 짜는 방법을 밝혀내지 못했다. 일본이나 독일로 선진기술을 익히러 갈 수도 없었다. 해외여행이 엄격히 제한되던 시절이었다.
“한 가지 방법뿐이었습니다. 직접 무수한 시행착오를 해가면서 원단 짜는 방법을 알아내는 것입니다. 무려 8개월을 밤낮으로 원단 짜는 기계 앞에 붙어 앉아 시행착오를 통해 해결책을 찾아냈습니다.”
원단 짜기는 일단 성공했지만 그다음은 염색이 문제였다. 우리나라에서 벨벳이 생산되지도 않는데 벨벳 염색공장이라는 것이 있을 리 없었다. 가마솥을 걸어 놓고 1야드씩 시범 염색할 때는 잘 되다가도 원단이 대량으로 투입되면 불량이 발생하는 일이 반복되었다. 겨우 염색기술을 습득한 뒤에도 난관은 있었다. 국산 염색기계가 없는 상태에서 염색공장을 만들어야 했기 때문이다.
“사실 남편은 기계에 대해 아는 것이 전혀 없는 상태였습니다. 그래도 할 수 없이 나름대로 염색기계를 설계해 철공소에 가서 만들어 왔습니다. 제대로 작동될 리가 없었죠. 공장 한쪽에는 못쓰게 된 염색기계들이 고철로 쌓여갔습니다. 생고생만 하고 회사는 부도가 날 지경으로 내몰리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이때 류 회장 부부에게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는 말을 실감케 하는 일이 생겼다. 대량생산에 나섰던 수노텍스(벨벳의 한 종류, 털이 길고 생산과 염색이 쉬움)가 대박을 터트린 것이었다. 덕분에 부도 위기를 넘겼고, 10년 만에 벨벳 직물 생산과 염색기술 및 염색기계 국산화에 성공했다. 이때 남편 이 회장은 “미치지 않으면 되는 것이 없다”는 말을 남겼다.

◆냉혹한 현실을 경험하다
국산화에 성공한 영도의 벨벳 품질은 독일산보다는 좀 떨어졌지만 일본제와 비슷한 수준이었다. 하지만 가격은 훨씬 저렴했다. 당연히 시장의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이제 ‘고생 끝, 행복 시작’일 것 같았다. 그러나 예상치 못한 시련이 또 기다리고 있었다.
“어느 날 갑자기 다른 회사에서 특허침해라며 고소를 했고, 창업주(이원화 회장)가 구속되었습니다. 경찰과 검찰은 자꾸 합의하라고 종용만 했습니다. 잘못한 것도 없는데 뭘 합의하라는 것이냐고 반박했고, 특허침해라고 고소한 회사에서 생산한 벨벳제품을 단 1야드라도 내 앞에 가져와 보라고 항의했습니다. 하지만 그야말로 우이독경이었습니다.”
사회적 약자의 억울함과 설움을 뼈저리게 느꼈다. 그러나 어떻게 획득한 기술인데 이대로 뺏길 수는 없었다. 조그마한 연줄이나 인연이 닿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찾아가 절박하게 도움을 호소했다. 노력이 통했는지, 담당검사는 특허침해 여부를 전문가에게 물어보기로 했고 의뢰받은 서울대 교수는 단번에 “이건 절대로 특허침해가 될 수 없다”는 의견을 내렸다.
이런 일도 있었다. 당시에는 수출을 장려하기 위해 수출품은 싸게, 내수용은 비싸게 판매되었다. 그런데 한 도매상이 수출용이라며 싸게 구입한 벨벳제품을 시세차익을 노리고 내수시장에 내다 팔았다. 이 때문에 창업주는 또 모든 죄를 덮어쓰고 10일간 구속되는 시련을 겪었다. 억울한 류 회장이 “도매상을 찾아 벌을 주자”고 주장했다. 그러나 남편인 이 회장은 “그 사람도 나름대로 답답한 사정이 있었겠지. 이미 지난 일이니 그만 용서해주자”며 아내를 달랬다.

◆도전과 위기, 그리고 전화위복
영도벨벳은 1975년 서울에 무역부를 신설하며 미국으로 첫 수출을 성사시키고 꾸준히 성장을 이어갔다. 일본과 독일로부터 우수한 기계와 설비를 도입해 경쟁력을 높였고, 1995년 1천만불 수출탑을 수상했다. 초창기 갖가지 시련과 어려움을 딛고 회사가 안정을 찾으면서 류 회장은 사실상 공동 창업자이자 경영자의 자리에서 가정주부로 돌아갔다.
류 회장이 경영일선으로 다시 나간 것은 IMF 외환위기 직전이었다. 1990년대 대구섬유기업의 70% 이상이 중국 등지로 공장을 이전할 때, 영도벨벳은 오히려 대구와 구미로 공장을 확장하고 첨단설비에 투자했다. 1995년에는 구미공장에 무려 500억원대의 대규모 투자를 단행했다. 연간 벨벳 생산량 800만 야드로 세계 최대 규모였다.
“IMF 외환위기가 닥치자 리스 100억원이 300억원으로 늘어났습니다. 설상가상으로 대구시에서는 산격동 유통단지 부지에 있던 공장을 1998년까지 이전을 끝내라고 성화를 부렸습니다.”
주위에서는 류 회장에게 "국가적 재난 상황이라 어쩔 수 없다. 부도를 내라"는 조언이 잇따랐다. 하지만 두 부부는 손을 맞잡고 “아무리 어려워도 부도 낸 기업가는 되지 말자”고 다짐했다. 서울, 대구의 집을 비롯한 자산을 팔고 담보로 맡겨 빚을 청산했다. 그러나 도저히 ‘리스 폭탄’은 감당할 수 없었다. 은행들과의 지루한 워크아웃 협상은 류 회장의 몫이었다. 수출을 위해 해외로 뛰면서 국내 은행들과 밀고 당기는 피 말리는 싸움을 계속했다.
역설적이게도 회사를 부도 위기로 내몬 최첨단설비에 대한 대규모 투자가 곧바로 기회가 됐다. 2001년 제직-염색-가공에 이르는 ‘일괄생산체제’를 구축하고 벨벳업계 세계 1위에 오른 것은 1995년의 투자 덕분이었다. 워크아웃도 2004년 7월 3년 만에 조기 졸업했다. 영도벨벳의 ‘쓰리 이글스’(THREE EAGLE) 브랜드가 세계 최고로 인정받게 되면서 중국 등지에서 모방제품이 쏟아져 나왔다. 대응책으로 1997년부터 제품품질보증에 대한 상표 표시인 영도벨벳 자카드셀비지(Jacquard Selvage: 영도벨벳 만의 설비시설과 기술로 제직할 수 있음. 이 자카드 로고가 없는 제품은 영도벨벳 제품으로 인정받지 못함)를 개발해 지적재산권을 강화했다.
류 회장은 “결혼 이후 57년 동안 벨벳 한 길로만 걸어왔다”면서 “1997년부터 벨벳의 새로운 변화된 모습을 보여주자는 취지에서 벨벳 벽지를 생산했고, 7년 전부터는 그 영역을 옷, 병풍, 탁자, 그림, 여름옷, 시계 등 생활용품 전반으로 확대하고 있다. 해외귀빈들에게 가족사진을 벨벳으로 제작해 주기도 한다”고 말했다.

◆1960년 창업한 ㈜영도벨벳…세계 최고 디자이너들 영도 '쓰리 이글벨벳' 선택
1960년 창업한 영도벨벳은 끊임없는 연구개발로 1970년대 아세테이트 벨벳, 1980년대 면 벨벳, 1990년대 물세탁을 할 수 있는 초극세사 폴리벨벳, 2000년대 인테리어 소재 등을 세계 최초로 개발한 세계 최고급 벨벳시장의 지배력 1위 기업이다. 매출 규모는 500억원 정도이다.
또 2002년부터 8년간의 연구개발 끝에 LCD 패널 제조용 러빙포 개발에 성공, 섬유회사에서 첨단소재 기업으로 변신에 성공했다. LCD 제조용 러빙포는 LCD의 화면을 구성하는 전자액정이 일정한 방향으로 배열될 수 있도록 유리기판을 마찰시키는 소재로 LCD 제품의 품질을 결정한다.
2012년 대구 중구 삼덕동에 건축한 ‘영도다움’(1천256㎡`약 380평 규모)은 지하 1층 벨벳아트 체험관, 1층 콘셉트스토어(벨벳아트작품 판매+카페), 2층 벨벳 라이프 스타일관, 3층 갤러리(예술가들의 벨벳아트작품 전시)로 구성되어 있다. 세계 유일의 벨벳전문전시관으로, 외국인들의 놀라움과 부러움을 사고 있는 공간이다.
영도다움의 ‘다움’은 사물이 자기다움을 가질 때 가장 바람직한 모습을 지닐 수 있다는 의미로, ‘영도다운 것이 바로 세계 최고로 가는 길’이라는 뜻을 담고 있다.
2004년 철탑산업훈장(고 이원화 회장), 2006년 동탑산업훈장(이성열 사장), 2009년 국민훈장 석류장(류병선 회장)을 수상했다.

석민 선임기자 sukmin@msnet.co.kr



출처 : 매일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