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60년을 걸어왔습니다.
그 길은 참 멀고 외로운 길이었습니다.
우리는 60년을 걸어왔습니다.
그 길은 참 멀고 외로운 길이었습니다.
영도벨벳 구미공장 전경.
1960년대까지 벨벳은 부의 상징이었다. 당시 비로드라 불렸던 옷감은 혼수품으로도 최고의 인기를 누렸다. 국내에선 생산기술이 없어 유통 물량의 대부분은 독일, 일본 밀수품이었다. 영도벨벳 류병선 창업자는 남편 고(故) 이원화 회장과 함께 1968년 벨벳의 국산화에 성공했다.
1960년 류 대표 부부는 처음 대구에서 직기 4대를 빌려 고무신에 들어가는 방한용 털을 짜는 사업을 했다. 그러다 눈을 돌린 게 벨벳 섬유였다. 독일제 원단을 가져다 놓고, 1년여 밤낮으로 직기에 붙어 앉아 연구해서 원단 짜는 방법을 알아냈다. 벨벳 불모지에서 맨손으로 일궈낸 성과였다.
◆섬유기업 해외로 눈 돌릴 때 구미에 대규모 투자
벨벳은 털이 촘촘하게 박힌 섬유 조직으로 의류·소파 등 다양한 제품에 쓰인다. 값비싼 해외 제품을 대체하며 국내 시장을 석권했고, 1975년부터는 수출도 했다. 사업은 승승장구였다. 1988년 1천만달러 수출탑을 받았고, 1990년엔 물로 세탁해도 모가 눕지 않는 마이크로벨벳을 세계 최초로 개발했다.
1990년대 들어 대구의 섬유기업 70% 이상이 중국 등 해외로 공장을 이전할 때 영도벨벳은 구미 국가산업단지에 대규모 투자를 단행했다. 메이드 인 코리아 자존심을 지키겠다는 의지였다. 하지만 1997년 외환 위기가 터지며 회사는 위기에 처했다. 달러 환율이 3배 가까이 치솟아 직기 리스 부채가 눈덩이처럼 커진 결과였다. 류 대표 부부는 끝까지 부도를 내지 않고 집까지 담보로 잡히며 악착같이 노력한 끝에 2004년 워크아웃을 조기 졸업했다.
이후 영도벨벳은 사업 궤도를 찾아 창업 40여 년 만인 2001년 세계 시장 점유율 1위에 오른 뒤 지금까지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2010년 3천만달러 수출탑, 2019년 금탑산업훈장을 받았다.
영도벨벳 구미공장 내에 마련된 산업문화복합공간 <비로드(Be road) 1960>. 구미지역 산업투어 코스로도 인기를 얻고 있다. 영도벨벳 제공
◆ 세계시장 점유율 1위…첨단 소재기업으로 변신
구미공장에서 생산하는 영도벨벳 전 제품은 90% 이상 세계 124개국에 수출한다. 어느 공정도 하청을 주지 않고 자체 보유한 연사-제직-염색에 이르는 일괄 공정은 경쟁사가 모방할 수 없는 기술력을 자랑한다. 특히 제직 전 원사를 특수 가공해 탄력성을 가하는 기술과 시간 조절로 염색하는 기술은 오랜 경험에서 축적된 노하우다.
이제 영도벨벳은 1등 섬유 기업에서 첨단 소재 기업으로 변신을 꾀하고 있다. 산업용 벨벳 개발에 나서 2006년 LCD(액정표시장치) 러빙포 국산화에 성공했다. 러빙포는 LCD의 액정 분자를 일정한 방향으로 정렬해주는 핵심 섬유 소재다. 2011년 LG디스플레이가 애플에 공급한 아이패드2 LCD 패널에 처음 사용됐고, 이후 세계로 수출하고 있다. 현재 영도벨벳 매출의 45%가 러빙포에서 나온다.
영도벨벳은 고밀도 LCD 러빙포 기술을 기반으로 미래 전기자동차에 사용할 수 있는 환경필터 벨벳, 리튬이온전지 음극활물질 벨벳, 탄성 복합 강판 벨벳 등을 개발해서 2030년 첨단소재 기업으로 도약을 꿈꾸고 있다.
류병선 회장은 "밀수를 통해 (벨벳이) 들어오던 나라가 세계 최대 수출국이 됐다"면서 "벨벳 분야에선 한국이 세계 최고라고 각인되도록 100년 이상 기업으로 뿌리내리도록 매진하겠다"고 밝혔다.
한편 영도벨벳 구미공장은 벨벳이라는 문화를 공유하기 위해 식당, 휴게실, 화장실 등 회사 공간에 벨벳으로 인테리어를 구성했고, 벨벳 문화복합공간 영도다움갤러리와 산업복합공간 <비로드(Be road) 1960>을 열었다. <비로드 1960>은 구미지역 산업투어 코스로도 인기를 얻고 있다.
이석수 기자 sslee@imaeil.com
벨벳의 자부심을 지키면서
새로운 경험의 길로 향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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